CREATE OR DREAM

  • 마카오에서 말로를 만나다

    군대에서 낙서 쓰듯 남긴 소설(?) 그날 밤 무작정 부서진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 담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나로서는 순순하게 복종은 하더라도 절대 후퇴 같은 건 하지말자는 게 인생의 지론이었으므로 그 상황에서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냥 앞으로 갈…

  • 아랍인 거주지에서의 사죄

    고되고 어두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째 밤이 계속 되고 있었다. 예하부대 X대대의 모범병사 이은X 병장은 자신의 거칠디 거친 생활에 대해 하소연을 쏟아놓았다. 우리는 아주 늦은 밤, 아무 불빛도 없는 암흑 속 깊은 참호 속에 몇 시간째 대기 중이었다. 아무 소리없이 대대장이 나타나 왜 교대시간이 되었는데 계속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교대자는 몇시간째 오고있지 않으며 무선상태는 계속…

  • 자격증 시험장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증 실기시험장에 갔다. 모두들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나도 마찬가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나는 자격증 포상휴가를 위해서였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는 ‘자격증’이라는 이벤트를 이용해 20대의 정서불안을 자극한다. 가만히 있어도, 쉴새없이 토익책을 넘겨도 뒤쳐지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자격증을 따는 행위는 일시적인 안위를 안겨준다. 단지 플라스틱 조각 하나일뿐인데. 그것은 마치, 한 개인의 능력을 증명해주는 증서처럼 행세한다.…

  • 바이올린

    말하자면 원형천정은 바로크풍이며,사람 다섯이 서로 손을 잡고 감싸안아야 겨우 마크할수있는 고딕풍의 기둥이 있었다.게다가 10미터는 넘을 것 같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는 까무잡잡하게 중동인의 피부를 한 예수가 죽어가는 모습이 있는,중앙의 거대한 홀.바이올리니스트는 인터내셔널가를 연주했고,로비 정면의 문은 뻥 뚫려있었다.사람들은 자유자제로 그곳으로 들어왔다.이태리제 정장을 입은 부르주아 신사들,고귀하신 강남 아줌마들,코흘리개 아이들,거지들,다리가 없어서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질질 끄는 남자,화장을 덕지덕지한 아리따운 여자들,내 친구들,…

  • 지하의 토악물

    이곳은 우리들의 마지막 요새로서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적들의 레이더망을 벗어난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나,불행히도 어떤 스파이에 의해서 우리의 위치는 발각되었다.그 때문에 우리는 입구를 지킬 결사대를 꾸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십수명으로 꾸려진 수류탄 결사대가 바로 우리들이었다.우리들은 겨우 수류탄 수십개만으로 입구로 향했다.적들은 족히 수백, 아니 수천명에 달할 것이며그들의 잔인함으로 말하자면 정말이지 끔찍하고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라고 했다.…

  • 지하 아케이드

    거대도시의 지하 아케이드아케이드 밖은 암흑과 검은 비 뿐일 것이다이번이 몇번째인가아케이드의 막다른 골목에서 H를 다시 만났다 행복한 기대와 두려운 예감이 끊임없이 머리 속에 교차했다이 혼란은 색맹처럼 세상을 알록달록하게 색칠해주었다사이키한 루프라이트가 머리 위에 떠돌았다H와 나는 말없이지하 아케이드를 계속 같이 돌아다녔지만 옆에 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어느샌가 내가 조용히 옆을 돌아보았을때 H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모퉁이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지하 아케이드
  • 난다

    너는 영웅처럼 멋지게 날지 못해하지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지?빼곡하게 깨진 병 조각들이 꽂혀있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서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잖아 그러니까 자유롭게 날 수 있잖아말도 안되는 비난들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날아가버렸다 산넘고 물건너 서울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난다 내가집집마다 불이 꺼져있었고 마을들은 폐허로 변해있었다서울로 가야만 했다 그곳에는 불빛이 있으리하지만 모두 꺼져있었다거리로 거리로 사람들이 벌거벗고 뛰어나왔다.노인들은…

  • 박쥐나비

    이곳에는 기분 나쁘게 생긴 흑색 나비들이 많아요.날개를 퍼덕거리며 제멋대로 날아다니고,우리가 걸어갈 때 아주 종종 우리의 시선을 방해하며 공기를 휘젓지요. 그러다가 기분 나쁜 그들을 쫓아내려 발을 내딛으면 얌체처럼 포플러나무 뒤로 사라져버리지요.어쩔때는 박쥐로 착각될 때도 있을 정도랍니다.더럽고 얌체같은 박쥐나비 새끼들.기분 나빠.물론 걔네들의 진짜 이름이 박쥐나비는 아닐꺼예요.파시스트의 진짜 이름이 이명박이 아닌 것처럼.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눈 앞의 적은…

  • 언어도단

    사육사의 달콤한 사탕에 길들여진 사자는 생각했다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채로끊임없이 미래와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두 눈은 붉게 충혈되고어지러운 상념들은 거짓말쟁이들의 달콤한 말들을숨쉴틈 없이 상기시키겠지그때마다 사자들은 구속되지 않는 채또렷한 정신을 유지해야 하지만 아무래도이런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가상 세계의 가짜 시나리오들이 만들어내는 가짜 언어가사막과 숲의 감각들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하다자신만만해진 나는쉴새없이 시간들과 부딪히며…

  • 청설모

    모두들 숨죽여요순수한 네 영혼이 구역질나는 썩은 잎사귀를 쏟아내는구나북쪽 산 너머에서 드리우는먹구름 총알들이 뚫고 지나가도나무 위로 오르는 너는자비심도 없이 한가롭게 흩어진 심장을 찾는 나는오늘도 어색하게 스치는 얼굴들과 뉴스들차가워진 가슴을쇠망치 들고 두드린다 억세게도짖누른다 파시스트들의 천국에서도네가 오를 나무는 있을테지입술 아래로 검붉은 피를 흘리며다음 일요일새벽 안개를 맞이한다 2008년 8월 28일, 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