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과제는 긴 밤을 기회로 삼아 대항세력을 조직하는 것뿐이다

아래 글은 노회찬 5주기 추모 심포지움 “복합위기의 시대, 정치의 재구성” 중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폐허의 응시: 심층적응 정치의 구상”에 대한 토론문이다.


1990년대의 지식인 논자들이 사회 혹은 사회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위기’를 외쳤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복합 위기’를 호명했다. 그조차도 십수년이 흘러 이제 ‘위기’를 말하는 것은 따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습관적으로 반복돼 왔다. 위기론 이후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냉소 혹은 침묵을 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조각들’로 열거한 사유를 통해 발제자(김윤철)는 이와 같은 복합위기 담론의 진부성과 보수성을 말하며, ‘단절’의 계기를 간절하게 요청한다. 그가 펼쳐놓은 ‘사유의 조각들’은 여러 좌파 지식인들 정치철학 논의들을 광범하게 포괄하는데, “폐허”를 “응시하자”는 요청에서는 레베카 솔닛이 제시한 유토피아주의적 사유의 소환을 엿볼 수 있고, 혹은 그가 직접 언급했듯 발터 벤야민의 역사유물론 속 “폐허의 폭풍”이라는 형상을 차용하기도 한다. 복합위기론으로 시작해 무기력하고 진심도 아닌 듯한 의지주의적 언설을 반복하는 것보다 다분히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는 상기한 논의들을 맥락화하려는 시도가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솔닛과 벤야민이 공히 강조하고 있는 주체화 매커니즘이 충분히 환기되고 있는지 아직은 알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급진적 사유가 현실의 언어와 연결될 때 너무나 쉽게 미끄러진다는 점이다. 미끄러짐을 피하기 위해 몇 번이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기실 발제자가 화두로 던진 ‘폐허의 응시’가 곧 ‘과거 = 모두 사라져버린 헛된 영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실로 오늘날의 세계에 등장해야 하는 ‘역사적 주체’는 ‘파국(폐허)’을 좌절과 희망, 연대, 연구, 실천을 통해 ‘응시’할 사건적 주체이어야 한다. 

집단적 주체를 형성시킬 사건이 성립하려면 지금 시대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지 되물어야 한다. 혹자는 포스트 신자유주의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포스트포드주의적 통제사회라고, 그리고 지정학적 논의를 중심에 둔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 자본주의가 서로의 ‘대안 없음’을 두고 쟁투를 일으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심화되는 위기 정세라고 말한다. 어떤 양상에 초점을 맞추든 이를 자본주의(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을 잠심해버렸고,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에 대체 어떤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을지 상상하지 못한다. 여전히 그것이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갖는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크게 축소됐고 동시에 반공주의 선동은 여전히 효과적이다. 이런 영향으로 포스트포드주의적 신화를 유포하는 이데올로그들은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상상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적인 가능성이나 전망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본주의 안에서만 욕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체제에서 우리는 ‘우울증’과 ‘기후재앙’을 맞닥뜨리고 있고, 이것이 드러낸 폐허 사이로 ‘K-담론’(K-방산을 포함해)의 범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Seeds of Time』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강고함과 유연성, 미래에는 반복과 재조합만이 남겨질 것이라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한데 ‘인류세 서사’를 유행처럼 받아들인 오늘날 이 말은 자본주의의 실패를 보다 적나라하게 지시하기도 한다. 발제자가 “계급 지배-피지배의 문제 설정을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서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필요한 사건적 주체는 (발제자는 애써 “탈물질주의”, “융합” 등을 언급했지만), 반자본주의 혹은 포스트자본주의 실천의 집단적 주체일 것이다. 

한데 공론장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폐허’로 묘사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종종 절망에 빠진 숱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선언하면서 이전처럼 정통적인 것을 고수하느니 차라리 현실의 바다에 뛰어드는 편이 낫다고 호기롭게 선언하며,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적 문법 체계에 투항한다. 마치 청년문화가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순진한 희망이 환원주의적인 판본의 현실을 수용하는 것으로 귀결됐듯이 말이다. (최근 정의당에서도 이런 경향이 또렷하게 목격되고 있다.) 이는 폐허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것에 가깝다.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실패의 반복일 따름이다. 이런 순응주의(혹은 냉소주의)적 시야에게 과거는 망각의 지대일 뿐이며, 미래는 끝도 없는 불안의 저수지에서 쏟아지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이미지」에서 “전통을 순응주의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려는 노력이 각 시대마다 재개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벤야민이 말한 ‘응시’이고, ‘폭풍’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또 다른 판본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복제하는 순응주의적 실천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려면, ‘폐허를 응시한다는 것’이 어떤 실천 양태를 가리키는지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폐허’가 된 자본주의 사회를 응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렇기에 구체적으로는 역사적 진보정당운동 반성을 밑거름 삼아야 하고, 반자본주의적인(최소한 친시장주의적이지 않은) 기후정의운동 흐름과 동행해야 한다. 가령 시장주의적 환경주의를 진보정당운동의 시야로 불러들이는 ‘탄소거래세 도입’ 주장이나, 공기업 재정 건전성 우려를 근거로 삼는 에너지 요금 인상 프레임을 강조한 나머지 그 책임을 자본에게 묻는 집합적 운동을 기각하는 것은 폐허 속으로 침잠하는 것에 가깝다.

발제자의 말대로 사회연대 기반과 관계망은 정말로 “완전히 부식되고 소멸”되었나? 무수히 많은 작은 사회들과 사회운동의 연결망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명제가 환기하는 과잉주체화된 중산층의 상태를 단순히 파국적인 것으로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정치의 죽음”은 여전히 정치화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가능성은 오직 정치가 죽은 장소에서 만들어진다.) 자본주의라는 天網에서 빗겨나있는 가능성들은 여전히 한시적이든 특정 공간에서든 등장하고 또 사라진다. 오늘날 사회운동(=정치)의 과제는 이렇게 등장하고 또 사라지는 포스트자본주의적 실천의 단초들을 다시 연결하고 재조직하는 것에 있다. 노동자운동은 그것을 ‘전략조직화’라는 틀로 구축할 수 있고, 시민사회단체들은 풀뿌리 운동 등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는 정당-의회 정치의 위기를 환기하며, 기존의 제도-관념 형태의 복원과 구현에 중심을 두는 접근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있다. 관념에 부합하는 질서를 먼저 세우고, 그 다음에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지양하자는 제안으로 보인다.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매우 뻔뻔한 양태로 이동하자 일군의 좌파들은 이제는 폐허가 된 세계에서 자신들에게 ‘자유주의 복원’의 책무가 지워진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통치엘리트의 자기 분열 속에서 근대국가의 규범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야만주의적인 자본주의의 도래를 막기 위해 자유주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향 역시 프란시스 후쿠야마에 의해 ‘역사의 종언’이 선언된 이래 무수히 반복된 “대안은 없다”는 환청의 복제에 불과하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기나긴 밤에 좌파의 과제는 오래된 역사적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냉소에 빠져 ‘역사의 종언’이라는 물결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긴 밤을 기회로 삼아 대항세력을 조직하는 것뿐이다. 패배한 주변성이라는 편리한 입장을 향한 낭만적인 애착에서 벗어나, ‘영년’에 열린 비어있는 영역을 장악해야 한다.

지난 십년 이상의 세월 동안 노동운동의 논의와 진보정당 안팎의 논의는 완전히 궤를 달리해왔다. 그러다보니 노동운동 내 담론이 진보정당에서 이해되지 않고, 진보정당들의 상태에 대한 진보정당 밖의 이해력 역시 크게 떨어졌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논의도 가능하지 않다. 좌파가 새로운 정치 영역을 장악해야 할 과제는 여러 운동들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남한 좌파는 그것을 개진할 계기도 찾기 어려워졌다. 폐허를 응시한다는 것은 주체의 조건을 가로지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할 때 ‘과제’를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출발점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운동은 20여년 동안 한편에서는 조합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전략조직화’라는 과제를 붙잡고 밀어붙여왔다. 그것의 물리적이고 양적인 성과는 적지 않은데, 동시에 이 물리적 성과는 통치엘리트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로 인식되어왔다. 윤석열 정부 이래 ‘노조 때리기’가 전면화되었던 것, 특히 조직률이 가장 높이 오른 건설노조에 대한 공격이 노골적으로 진행된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계속해서 전략조직화 사업을 이어가면서(특히 날로 늘어가는 이주민의 조직화를 중심으로), 동시에 질적인 조직화, 즉 이미 새롭게 조직된 조합원들의 재조직화(교육 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 노조 교육사업의 혁신이 전면화되어야 하고, 이는 조직문화 혁신이나 청년 노동자의 주체화, 그리고 산업 재편 등 한국 사회 변화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혁신 과제들을 순조롭게 이어가기에 노동운동에는 정파 노조 문제와 활동가 재생산 매커니즘의 복원 등 모순들이 산재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혁신 과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주체 구심점을 강력하게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민사회운동은 사회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중심으로 자기분열을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포용성을 수용하는 경향과 반자본주의적 경향으로 점차 나뉘는 것이다. 모두가 ‘진보’라는 오래된 프레임 안에 묶이지만, 궁극적으로 이 두 경향이 하나의 배를 타긴 어려워보인다. 애석하게도 전자는 노동운동에 대한 통치엘리트들의 공격을 바라보며 “노조도 문제가 많지”라고 반응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진보정당 내 일부도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에서 시민사회는 정치적 부족주의와 진영론 정치에 사로잡힌 경향과 합리주의으로 기성 정치를 비판하는 경향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이것이 곧 사회정책에 대한 입장의 분열 흐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시민사회에는 혼돈이 지속될 것이고, 과거의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을 상기하는 명실상부한 구심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좌파는 오히려 그러한 과거의 영예를 반복해야 한다는 헛된 갈망을 뿌리쳐야 생존할 수 있고, 그럴 때에야 더 강력한 구심을 만들 수 있다. 이미 맞닥뜨린 분열의 여정을 보다 정치적이고 진지하게 통과해야만 포스트자본주의 실천을 중심으로 한 집합적인 주체화(대항세력 조직 등) 역시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제문에서 ‘전략적 실천 항목’으로 제시된 타협·회복·복원·포기의 4개항을 주목하고 싶다. 이 메모의 진의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게 맞다면, 나는 이 실천 방향에 (‘붕괴력의 도입과 실시’라는 대목을 제외하고) 대체로 동의한다. 문제는 이런 급진적 사유가 현실의 언어와 연결될 때 너무나 쉽게 미끄러진다는 점이다. 미끄러짐을 피하기 위해 다소 추상화된 듯한 이 실천항을 보다 정치적인 언어로 반복하고 재생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모든 징후적 현상들을 향해 정치적인 개입의 틈을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발제자는 우울증이 “지배적인 병리현상이 됐”다고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개인들이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홀로 감당하게 됐다고 분석한다. 기실 정신건강의 위기는 오늘날 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낳은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증대하는 심리적 고통은 매우 보편화됐다. 그럼에도 이 체제는 정신질환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다루는 일에 집중한다. 우리는 개인화되고 정치로부터 탈각한 정신건강 문제를 정치화해야 한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시스템 자체를 문제삼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지 분석·비평을 통해, 그리고 집합적인 운동의 기획을 통해 개입해야 한다. 우울증은 많은 사회병리적 현상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직장문화와 학교제도, 대중문화 등에서 그렇다. 이 개인화된 우울증, 정신건강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미학적 비판(심미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인정하고, 매우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주장에 머무르는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과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이 새로운 정치가 출발할 지점일지도 모른다.

2023년 7월 3일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