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어떻게 읽고 또 관계맺을 것인가

『차이나 리터러시』 서평

‘혐중을 넘어 보편의 중국을 읽는 힘’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 <차이나 리터러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중국을 해석하고 접근하는 형식과 내용에 대한 비평이자, 하나의 가이드이다. 저자(김유익)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매우 논쟁적인 쟁점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이야기한다. 역사, 대중문화, 지리, 정치경제 등 여러 층위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면서 ‘중국’이라는 화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단 그 출발은 “국가와 시민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점에서 시작되는데, 중국 시민 일반을 모두 싸잡아 ‘중국’이라는 추상적 기호로 비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중국 체제를 지탱하는 질서가 송나라 시기에 형성된 제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거자오광(葛兆光)의 관점을 통해,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공통성을 이해하는 경로를 제시한다. 북송 시대 사대부들은 당시 요나라나 서하와의 긴장된 관계로부터 ‘한족의 중화 국가’라는 관념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중화-오랑캐'(화이) 구분이 다분히 문화적인 층위에 머물러 있었던데다 경계 역시 모호했다면, 북송 시대에 이르러 사대부 관료들은 ‘한족의 중화국가’라는 관념을 이후 1천년 동안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후 이뤄진 유목세력의 침략과 이민족 왕조들은 한족 사대부들에게 반감을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한족 사대부들에게 남겨진 원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러한 역사가 남긴 한족 중심 문화에 대한 애착과 반감이 오늘날 중화권 한족 질서의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저자는 한족 엘리트들의 화이 관념을 단순히 해설하거나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방법으로 삼아, 어느덧 제1세계 시민(일종의 명예백인?)이 된 한국인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그밖에 다른 권위주의 국가 시민들에 대해 갖는 모종의 우월적 시선을 돌아보길 요청하는 것이다. 사실 변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국제정세가 위기로 치달아갈 때 삶의 위기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오늘날 홍콩과 오키나와, 제주 강정, 대만 민중들이 맞닥뜨린 정치적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위기 정세에서 민족주의 논리는 설명력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변경의 회색지대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는 중화권 상황에 대한 우리의 리터러시도 결함을 드러낼 것이다.

그밖에도 저자는 SF, 쌍순환(双循环), 도시-농촌 개발, 제조업과 소비문화, 중화민족 개념, 검열, 애국주의와 소분홍(小粉红), 제로 코비드 정책에서 드러난 정부 공리주의와 보통 사람들의 가족주의의 대립, 법률제도, 남방 사회 내의 화인 정체성과 독립 의식 등 다양한 코드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당대 중국에 대한 오해와 왜곡, 나아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들을 해설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중국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한국의 매스미디어에서 “중국은 왜”라는 질문 뒤에 따라붙는 여러 코드들을 해석할 매뉴얼을 제공한다. 이 책은 분명 자신의 관점을 갖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이고 단순한 인과론만으로 그치진 않는다. 문화적 코드들을 폭넓게 늘어놓고 해석하고 연결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책의 진미는 여기서부터다. 중화권 남방에는 모종의 ‘내부 소중화’ 의식이 존재하는데, 송나라 이래 이민족들이 한족 왕조를 침략했을 때 많은 한족 엘리트들이 남방으로 이주했고, 이에 따라 남방이야말로 화인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청말민초 시기 광둥어 네이티브 량치차오는 “중화민족”이라는 관념을 창안한 장본인이었는데, 이는 남방 화인들의 이런 특성을 설명하는 한 예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방 사람들에게는 동시에 지역주의적인 독립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기도 하다. 남송 시기의 역사나 명나라 멸망 시기 청에 저항했던 황실 후손들, 청에 저항하다가 대만에 왕국까지 세웠던 정성공, 객가 출신으로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등이 “대륙을 점령한 중앙 오랑캐 정권에 저항하는 중층적 정통성 역사의 서사”의 증거다.

저자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개념을 빌어 이를 해설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갖는 질투와 시기심을 가리켜 르상티망을 설명하면서, 르상티망 속 약자가 강자에게 부정적 프레임을 씌워 본인을 ‘선’으로 포장하는 본성을 갖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남방 화인과 조선의 전통사회의 ‘소중화’, 오늘날 대만과 홍콩 내부에 새겨진 반중국 정서 등을 르상티망으로 설명하려 시도한다. 물론 저자가 모든 이념적 정의감이나 악에 대한 분노를 모두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내 삶’과의 구체적인 연관성을 거쳐 유기적으로 통합해야 진짜 우리 삶의 윤리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후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각종 ‘K-담론’ 역시 르상티망(책에서는 ‘르상티망 플러스’라고 명명하고 있다)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이는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우월감, 중국에 대한 희화화와 혐오와 연결된다. 홍콩에서도 이런 르상티망은 자신의 방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오늘날 홍콩 사회에는 대륙에서 이주해 온 하층민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저자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중국인들의 방어기제를 발동시키게 되고, 결국 정당한 비판들에 대해서조차 반성적으로 사유할 여지를 줄인다고 본다. 우리의 희망과 달리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 공감한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저자는 당면한 국제 정세에서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노선(세 가지 트랙)까지 제언한다. 첫째, 여전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 핵심 국가와의 관계를 중시하되(심지어 반중 전략에 조금 기대면서까지), 다만 우리가 나서서 반중 대리전을 펼쳐선 안 된다는 것. 둘째, 비중비미(非中非美)를 해야 하는 비슷한 입장의 나라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 셋째, 중국을 플랫폼으로 여기고 그 플랫폼을 이용하는 참여자가 되어 활용하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경험을 쌓음으로써, 블루오션식 협력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중국 사회나 문화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평이자 가이드라는 점에서, 더 많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저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난맥상에 빠진 국제 정세를 돌파해야 하는 기본전략이나, 지식인들의 윤리와 태세에 대해서까지 논하고, ‘국뽕’ 신화에 빠진 K-담론에 대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개입이기도 하다.

저자는 전통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 문화를 비교한 역사학자 백승종과 샹뱌오의 설명을 들어 오늘날 어떤 지식인이 필요한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천하의 일을 판단할 보편적 도덕과 정의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공공 지식인’과 마을 주민들의 일상의 이해관계에 개입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향신’의 도덕과 정의는 매우 다르다. 조선시대 마을 선비의 태도가 공공 지식인에 해당한다면, 향신들은 마을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과 깊숙이 맞닿아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샹뱌오로부터 ‘현대의 향신’이라는 지식인 모델을 상기하한다. 저자가 보기에 샹뱌오는 한 사회의 공공 지식인으로서 보편적 가치와 이론을 설파하면서, 항상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주위에 벌어지는 일들을 판단하고 실천함으로써 지식인들의 본질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증명하려 시도한다. 샹뱌오가 보기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은 현대의 향신을 좌파 사상과 결합한 것과 같은데, 오늘날 중국에서 중앙과 지역이 조화롭게 유기적 발전을 지속하려면 ‘현대의 향신들’이 전역에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제안을 진지하게 청취하고, 한국인들이 중국을 보는 관점과 관계맺는 방법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식인 담론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고, 또 그것에 개입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나 리터러시’를 견지하고, ‘주변’이 ‘상실’되어가는 이 세계에 트랜스내셔널한 시야와 실천으로 ‘부근’을 조직해나가려면 어떤 실천의 양식이 필요한데, 지식인 담론에만 그치는 것은 자못 아쉬운 결말이다. 샹뱌오가 제시한 ‘현대의 향신’을 보다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현실의 시민사회운동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이 책은 저자가 매우 폭넓게 중화권과 동아시아 지식사회의 담론을 섭렵해온 저자의 ‘엑스 리브리스(ex libris)’이기도 하다. 매우 방대한 담론을 훑으며 중국 읽기를 시도하기 때문에 저자가 인용하는 텍스트들을 2차적으로 읽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가 소개한 1차 저작들을 얼핏 읽어봤거나 들어보기라도 했다면 이해하기에 좀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같이 생소하다면 매우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저자의 주장에 상당히 동의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대목들도 있었다. 가령 저자는 청년 세대 반중 감정의 이유로서 <삼국지>와 <영웅문>을 보며 자란 중년 세대와의 차이를 거론한 <K를 생각한다>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데, 이는 저자가 경계한다는 문화결정론적 관점일 것이다. 반중 감정이 극도로 치솟은 오늘날 20~30대와 50~60대 간 반중 정서의 지표상 차이는 거의 무의미하다. 한중 관계가 좋았던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일 뿐일 수도 있다. 더구나 이는 민주당 지지율의 차이 등 다른 요소와 연동된 결과로도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과거 30년간 한중의 밀접한 경제 발전이 한국 경제에 구조적 이중화 문제를 가져왔다는 <좋은 불평등>의 자의적 해석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 불평등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래의 비정규직, 재벌 등 모순에서 기인한다는 시각이 “잘못된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정책 처방도 틀렸다”고 주장하는 이 책의 기본적인 관점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반박된 바 있다. 오늘날 경제 모순을 일국적인 틀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틀에서 분석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타당하지만, 이 책의 진단과 처방은 모두 틀렸다. 이 책은 자신의 무지에 근거해 기존 통념을 허수아비 때리듯이 비판하는데, 이미 좌파는 불평등이 1990년대 중반부터 심화되었음을 인지하고 비판해왔다. 임금 격차가 1994년부터 벌어진 것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연봉제 개편과 대기업-중소기업 간 차이의 심화에서 근거하지, 이 책이 편의적으로 주장하듯 단순히 중국의 개혁개방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 책이야 말로 매우 단편적인 요인을 전체로 침소봉대한 심각한 사례 중 하나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괴이한 제목을 달고 논란을 일으킨 이 책은 짧게 설명하기엔 문제가 많아 다른 글을 통해 따로 비판할까 한다.

<차이나 리터러시>라는 훌륭한 책에 이런 옥의 티가 남아있다는 것은 자못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독자에게 많은 인사이트를 주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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