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회고

몇 년 동안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 연말연시에 워낙 바쁘기도 하고, 단지 또 하루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한데 올해의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아무래도 한 해를 매듭짓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부터는 좀 다른 리듬으로 살고 싶고, 또 내 마음을 새롭게 다듬고 싶어서다.

2022년 하반기에 나는 ‘2023년에는 꼭 쉬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워낙 번아웃이 심하게 오기도 했고,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022년에는 건강 상태가 최악으로 치달아서 밤에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숨이 가빴으며, 허리디스크가 자주 도지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어려움은 대체로 ‘과로’와 ‘스트레스’에서 비롯됐던 것으로 보인다.

2022년 연말 즈음 나는 주변의 잔소리와 나 스스로의 필요성 때문에 몇 가지 변화를 시도했다. 우선 이비인후과의 수면센터에서 수면무호흡 진단을 받아 양압기 착용을 시작했고, 양압기 도움을 받은 덕분에 무호흡 상태로 수면을 괴롭히는 일을 줄였다. 두번째로는 디스크 환자를 위한 1대1 필라테스 강습을 수강했는데, 비용이 꽤나 부담스럽긴 했지만 몸이 차츰 나아진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것을 2023년 5월까지 이어가다가, 11월부터는 남성 전용 필라테스반에 등록했다.) 세번째는 2023년이 되면 플랫폼c 활동을 반상근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이 중 첫번째와 두번째는 지속하고 있고, 세번째는 결심대로 하지 못했다.

플랫폼c에서 반상근 활동으로 전환하겠다는 내 생각은 번아웃 때문이기도 하고, 내 기질이 매일 출근하는 일에 맞지 않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이건 내 뜻대로 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5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안식월 휴가를 가졌다. 그 전에 마련한 제도 덕분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안식월 시작 전까지도 엄청 바빴던 기억이 난다. 5월 초에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 주최의 쟁점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았기 때문인데, 이 토론회에서의 발제를 준비하기 위해 꽤나 진땀을 흘렸다. 이 발제문은 블로그에도 올려두었다. 5월 중순에 안식월 휴가가 시작됐을 때조차 나는 바로 쉬지 못했다. 5월 말에 예정된 어느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월 시작과 함께 이 일에 열중했고, 5월 말이 되어서야 진정한 휴가가 시작됐다.

가오슝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진짜 휴가가 시작됐는데, 애석하게도 그 당시 대만은 엄청나게 더웠다. 타이난에서의 3박4일, 타이중에서의 2박3일을 보내고, 타이베이에서 일주일 가까운 시간을 보냈는데 예정했던 한 달을 미쳐 채우지 못하고 11일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비행기삯 등에서는 손해가 컸지만, 어차피 여행은 또 가면 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함께 사는 사람과의 안정과 휴식이니까!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8월 초에 2박3일 동안 강릉 여행을 다녀온 것 빼고는 두 달 내내 집에 있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여러 집안 일들을 처리하고, 항상 부차적으로 취급하던 ‘돌봄’에 노력을 기울였다. 베란다를 완전히 깨끗하게 비웠고, 집안 곳곳의 곰팡이를 청소하고, 그밖에 여러 잡다한 일들을 마무리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그동안 내가 집 밖에서의 일들에 열중하느라 집 안의 일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반성했다.

올해 나는 각각 다른 출판사들의 제안으로 여러 책의 집필을 계약했고, 몇 번은 거절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제안을 받는다는 게 한편으로는 행복한 일이라고 여겨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짐이 된다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저지르고 약속하면서 발전하곤 했기 때문에, 그게 내 삶의 동력이라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정말 많은 칼럼을 썼고, 여러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한겨레>와 <주간경향>, <매일노동뉴스>의 정기 칼럼 기고는 올해 내내 계속했고, 또 여러 기관의 제안으로 여기저기 강연도 다닐 수 있었다. 때로는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매번 다른 주제로 강연들을 하면서 나 스스로 공부도 많이 됐던 것 같다. 강연 주제들을 대충 헤아려봐도 십수개는 되는 것 같은데, 그때마다 매번 성심껏 강연자료를 만들었다. 한 번만 하고 말기엔 너무 아깝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든 다시 활용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강연을 준비하고 2시간 동안 열심히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말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공부가 되는가에 대해선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가령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교육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의 리서치와 공부가 필요한데, 내 생각에는 계간지에 한 편의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력이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금속노조 이주담당자회의에서 가진 여러 차례의 연속 교육은 (강연료는 적었지만)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이에 반해 강연료를 많이 받을 수 있고 교육 대상자수도 많은 교육도 있었는데, 이 역시 다른 의미에서 좋은 경험이 됐던 것 같다. 넓은 공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또 다른 차원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올 한 해 강연 및 20분 이상 발제자로 참여한 자리는 다음과 같다.

  • 3월 30일, <21세기 자본주의에 맞선 동아시아의 대중운동>, 플랫폼c 월례포럼
  • 5월 10일, <중국 노동자계급의 어제와 오늘>, 금속노조 이주담당자회의
  • 5월 15일, <노동시장 분절화 담론의 노조책임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길내는모임 쟁점토론회
  • 5월 17일, <진보정당-민주노조 관계와 청년세대 노동자 조직화를 둘러싼 논쟁>, 청년정의당
  • 5월 25일, <전쟁과 불평등의 시대, 동아시아 시민들의 국제연대를!>, 안양시 노동인권센터
  • 5월 26일, <21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이주>, 다가치포럼
  • 6월 27일, <포스트 도이모이 시대의 베트남 노동운동>, 금속노조 이주담당자회의
  • 6월 27일, <인도네시아 노동자운동의 어제와 오늘>, 금속노조 이주담당자회의
  • 8월 24일, <대만 노동운동의 어제와 오늘>, 공공연구노조 한국의류시험연구원지부
  • 8월 31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는 무엇이고, 역사와 쟁점은 무엇인가>, 공공운수노조 서울서비스지부
  • 8월 29일, <방글라데시와 네팔 노동운동의 어제와 오늘>, 금속노조 이주담당자회의
  • 9월 5일, <동아시아 음식배달 플랫폼 노동자들의 오늘 – GRAB과 MEITUAN 사례>, 서울노동인권센터
  • 9월 12일, <동아시아의 이주가사노동자 – 싱가포르·홍콩·대만 사례>, 서울노동인권센터
  • 11월 20일,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북토크, 광주 소년의서
  • 11월 22일, <팔레스타인 문제의 이해와 반전평화>, 정의당 송파구위원회
  • 11월 23일, <동시대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갈등과 국제연대의 모색>, 전국민주시민교육박람회
  • 12월 12일, <동남아시아의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와 한국 자본>,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 12월 19일, <체제전환운동포럼? 정치대회? 그게 뭔데? 왜 하는 건데?>, 플랫폼c 월례포럼

가장 기억나는 일은 9월 초에 Kevin Lin이 한국 노동운동과의 교류를 위해 서울을 찾아 케빈을 위해 이런저런 스케쥴을 잡아줬던 일과 9월 말 타이베이에서 열린 <동아시아 노동운동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타이베이에 체류했던 일이다. 이때 동아시아 곳곳에서 온 훌륭한 연구자 및 노동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앞으로 내게 큰 자산이 될 것 같다. 200여 명 규모로 치러진 이 행사가 다음에 더 큰 도약과 전진을 이루려면, 이 기억을 안고 각자의 공간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꾸준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올 한 해 거둔 큰 진전이 있다면, 음주를 많이 줄였다는 사실이다. 2022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셨지만, 이제는 이틀에 하루 꼴로만 마시고, 양도 한두 잔 정도로 많이 줄었다. 그리고 또 다른 진전은 요리 실력이 조금 더 늘었다는 점이다. 나 자신의 일상을 경영하는 힘을 키우는 이런 시도들이 내 멘탈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점도 깨달았다. 예전에는 세상의 거대한 것들만 생각하고, 거대한 일들에 대한 거대한 고민들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작고 사소한 실천들이 거대한 것 앞에 짓눌린 내 일상을 지켜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올해 영어 공부를 꾸준하게 했는데, 아주 약간 회화 실력이 늘어난 것 같다. 내년에는 더 꾸준히, 그리고 보다 집중적으로 영어 회화를 ‘습득’해야 할 것 같다. (많은 조언자들에 따르면 ‘공부’가 아니라 ‘습득’이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함께 사는 사람과 더 잘 소통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혹은 그렇게 느낀다는 점이다. 나는 꽤 오래 나 스스로만 생각하고, 나 잘난 맛에만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이 내겐 무척 소중하다.

물론 답답하고 갑갑한 일도 많았다. 한국 사회의 여러 정황은 악무한을 거듭하고 있고, 사회운동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또,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미얀마 등에서는 전쟁과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운동이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체제전환운동포럼과 정치대회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고, 그 다음 스텝을 잘 밟아야 할 것 같다.

이제 1시간 남짓 남았다. 매년 하는 결심 같긴 하지만 2024년 새해에는 더 여유롭고 건강한 한 해를 보내고 싶다. 나 스스로는 건강과 가까운 사람에 대한 돌봄에 더 신경쓰고, 플랫폼c에서는 살림살이에 치중하는 한 해를 보내고 싶다. 부담이 큰 일은 줄이되, 책 쓰는 일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연말 들어 관심을 집중하던 공간 마련을 위한 고민에 대해서는 이곳저곳 팔로우하면서 기회를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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